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앙리 베르그송 (문단 편집) == 철학사에서 위치 == 보통은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빌헬름 딜타이]]와 같은 생의 철학자로 구분된다. 이것은 주로 독일 철학의 관점에서 그렇게 규정되는 것이고, 프랑스 철학의 시각에서는 현대 프랑스 철학의 아버지로 지목된다. 멘-드 비랑에서부터 이어지는 프랑스 유심론 전통의 적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정신과 물질에 관한 해석에서부터 기본적인 입장들은 모두 이 전통에서 해석 될 수 있다. 베르그송의 초기 작인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들에 대한 시론》 에서는 칸트를 인용하는데, 거물인 칸트를 비판 대상으로 삼아 자신의 주장에 권위를 부여하고자 했던 것이다. 학술 세계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베르그송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프랑스 학계는 신칸트학파가 득세하던 상황으로, 칸트를 인용하지 않으면 그 철학적 가치가 평가절하되던 분위기였다고 한다. 후에 베르그송은 자신이 칸트로부터 거의 영감을 받은 바가 없다고 고백한다] 실제로 이 책에서는 칸트는 비판의 대상으로 등장하고 있고, 그의 주저 [[창조적 진화]]를 보건대 베르그송이 주적으로 삼은 것이 칸트라고 보이지도 않는다. 칸트의 학설과 베르그송의 학설은 반대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다르다.[* 오히려 당시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베르그송의 학설이 반칸트주의로 소비되곤 했다] 더 중요한 것은 확인이 필요한 바이지만, 베르그송이 프로이트의 최초 인용자로 프랑스에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베르그송이 프로이트를 인용한 것은 이미 베르그송이 <시론>과 <물질과 기억>, <웃음>을 출간하며 프랑스의 스타 철학자가 된 1902년으로, 이 당시 프로이트는 막 <꿈의 해석>을 출간한 상태였고, 아직 엄밀한 의미에서의 "정신분석학"은 시작되지도 않았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베르그송의 세계적인 명성에 비추어 볼 때, 프로이트의 인용이 베르그송의 논의에 권위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그 반대이다. 그는 시간에 대한 탐구를 일생동안 지속했는데, 그것은 주로 공간에 대해서 탐구해 온 [[파르메니데스]]-[[플라톤]] 이후의 서양철학 전통에 대해 전복을 꾀하는 것이다. 2500년간의 서양철학사가 그에게는 '시간 망각의 역사'라고 생각되었고, 본질상 분절할 수 없는 '시간'을 마치 공간처럼 따로 일부분만 떼어서 분석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해 온 철학사의 오류들을 시간을 정당하게 인식해야 바로잡을 수 있다고 하였다. 대표적인 것으로 [[제논의 역설]] 중 하나인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에 관한 역설을 그는 비판하면서 시간과 운동은 분절시킬 수 없으며, 운동이 지나간 자리에 불과한 '궤적'을 공간적으로 임의로 분절시켜 아킬레스가 거북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처럼 묘사한 제논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과거의 베르그송 해석은 주로 그의 저서 "창조적 진화"[* 이책에서 쓰인 용어중에 딴곳에서 오용하기로 유명한 용어로 élan vital(생의 약동, [[엘랑 비탈]])이 있다. 이 표현들은 심지어 1930년대에는 말할 필요도 없고, 1920년대 베르그송 철학이 한국어로 번역되기 이전에도 널리 유행하여 신문 기사 등에 쓰이고 있었다. 이것은 틀림없이 일본어로 베르그송을 접한 사람들의 영향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일본어로라도 당시에 베르그송을 정통했다고 보기는 힘들고, 큰 고민 없이 유행에 휩쓸려서 썼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를 중심으로 한 생명과 진화에 대한 독특한 해명에 중심이 맞춰줬고 그래서 생의 철학자로 구분했으나 요즈음에는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들에 대한 시론"과 "물질과 기억"에 나온 지속이라는 그의 독특한 시간이론과 그 방법론에 대한 논의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져 새로운 현대적 형이상학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고 하지만, 그건 사실 한국이나 일본 등에서 평가하는 바이고 서양에서는 영국과 미국 학계가 주도한 [[심리철학]]과 현대[[과학철학]] 사조에 눌려서 사실 많이 죽었다. (고 하는데, 논란의 여지가 많은 포스트구조주의에 속하는 [[질 들뢰즈]][* 질 들뢰즈의 철학이 베르그송 철학에서 심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이제는 거의 공인된 사실이다. 들뢰즈를 소개하는 책에는 어김없이 베르그송 항목이 들어있을 정도이니.]나 해체주의의 자크 데리다 같은 사람들보단 훨씬 많이 연구되는 사람임. 물론 영미철학계에서는 관심이 없다.) 1950년대 이후 비약적인 자연 과학의 발달로 베르그송의 과학 인식은 많이 낡은 개념으로 치부되는 것이 사실, 그래도 적어도 출신국인 프랑스 철학계에서는 20세기 프랑스 철학사의 주류로 대접받는편, 그의 다양한 저술들이 프랑스 학자들에게 널리 읽히면서, 윤리학 정치철학 사회철학 전반에 영향을 끼쳤고, 현재 프랑스의 철학교육과정에서도 상당히 중시되는 인물이다.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을 번역한 최화 교수는 "세계 어디서도 이러한 철학사 파악은 찾아볼 수 없으며, 플라톤과 베르크손이 짝지어져 이처럼 깊이 이해되고 이처럼 높이 평가된 적은 없다"라고 서문에 쓰고 있는데, 이걸 뒤집어서 얘기하면 (프랑스를 제외하면) 한국에서 유독 베르그송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 그러나 이러한 책 홍보문구로 뽑기 딱 좋은 문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물론 이것이 한국의 자생적인 철학사조라면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한때 불다마는 유행일 수도 있다. 새로운 조류일지, 반짝 유행일지는, 베르그송에 대한 수입이 이루어진 지 아직 2세대가 지났을 뿐이기에 조금더 지켜봐야 할 일. 덧붙여 말하자면, 여전히 한국의 철학계에서 프랑스철학 전공은 독일철학 전공과 비교도 할 수 없이 소수이며, 프랑스철학 안에서 베르그송을 단지 번역의 대상으로만이 아니라 일생을 걸고 연구하고 있는 학자들은 더 극히 소수라고 보아야 한다. 근래 학계 동향을 보면, 프레데릭 보름스(Frédéric Worms)를 필두로 해 다시 베르그송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